궁극적 목표는 기업 고객 확대… B2C2B 전략 살펴보기

조직이 세분화되고 빠른 업무 속도가 요구되면서 협업툴 없이는 일하기 어려운 시대가 됐습니다. 그중 기획자와 디자이너, 개발자, 마케터 등 디지털 프로덕트를 만드는 실무자 사이에서 특히 주목받는 서비스가 있습니다. 바로 노션과 캔바, 피그마입니다.
이들은 지난해 들어 국내 시장 공략을 본격화했습니다. 노션은 지난해에만 한국 지사 인력을 열 배 이상 늘렸고, 캔바도 마케팅과 세일즈 현지화를 위해 캔바코리아유한회사를 설립했습니다. 피그마는 올해 상반기 한국어 버전을 공식 출시했죠.
한국 시장에 집중하는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우선 AI를 포함한 최신 기술 수용도가 높고요. 동시에 기업의 ‘사일로(Silo)’ 문제가 심각합니다. AI에 집중하고 있는 세 협업툴 입장에서 한국은 자신들의 가치를 가장 잘 증명할 수 있는 시장으로 여겨지고 있다는 의미입니다.
👉 연관 콘텐츠: 한국 진출 본격화한 피그마 CPO가 말하는 AI 시대 디자이너는?
이들의 행보에선 많은 유사점이 발견됩니다. 시기뿐 아니라 전략 면에서도 그렇습니다. 철저하게 재설계된 현지화 제품을 출시하고, 대규모 브랜드 캠페인과 글로벌 대표 행사를 진행하며, 사용자 커뮤니티와 교육 프로그램을 적극 지원 중입니다.
이런 전략은 얼핏 개인 사용자를 늘리기 위한 행보로 보이지만, 실은 더 큰 의도가 담겨 있습니다. 바로 기업 고객 확보를 위한 ‘물밑 작업’이라는 점입니다. 일반적으로 사스(SaaS) 비즈니스의 주요 매출원은 엔터프라이즈 고객인데요. 협업툴 특성상 기업을 곧바로 설득하는 건 까다로우니 실무자의 업무 행동을 바꿔 자연스럽게 조직 내로 침투하려는 전략입니다.
이처럼 글로벌 협업툴 3사는 상향식(바텀업, Bottom up) 형태의 B2C2B 비즈니스 모델을 국내에서 펼치고 있습니다. 이들이 왜 한국 시장에 주목하는지, 전략에서 발견되는 공통점은 무엇인지 살펴봤습니다.
왜 지금 한국 시장에 진출?
세 서비스 모두 글로벌에서 강력한 입지를 다졌습니다. 문서 작성에 특화된 노션은 포브스 클라우드 100대 기업 중 90% 이상이 도입한 AI 기반 워크스페이스고, ‘PPT 제작 툴’로 알려진 캔바는 2억4000만명의 사용자를 갖춘 비주얼 커뮤니케이션 플랫폼입니다. 어도비로부터 200억 달러(약 29조 원) 인수를 제안받기도 한 피그마는 대표적인 실시간 UI·UX 디자인 협업 플랫폼이죠.
국내 진출 자체는 꽤 됐습니다. 팬데믹이 계기였습니다. 원격 근무가 확산되자 기존 그룹웨어의 한계가 드러났고, 실무자들이 자발적으로 더 나은 도구를 찾기 시작했습니다. 이후 별도의 마케팅 없이 제품력만으로 입소문을 타며 빠르게 성장했습니다.
그러던 지난해부터 한국 시장에 대규모 투자를 단행합니다. 엔터프라이즈 비즈니스를 시작하기 위해서입니다. 여느 사스 기업이 그렇듯, 이들도 기업 고객을 늘리고 싶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한국 시장은 꽤 특별한데요. 사용자 측면과 기업 구조 측면 두 가지 이유 때문입니다.
우선 국내 사용자는 새로운 기술에 열려있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특히 AI 수용도가 높습니다. 지난해 한국 IDC 조사에 따르면, 국내 주요 기업·기관의 72%가 이미 생성형 AI를 업무에 활용 중입니다. 이는 아시아태평양 지역 평균을 상회하는 수치죠. 지난해 발간된 캔바의 비주얼 이코노미 보고서(Visual Economy Report)도 “한국 비즈니스 리더 10명 중 8명이 이미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 AI 도구를 활용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노션과 캔바, 피그마는 모두 최근 1~2년 새 AI 기능 고도화에 집중하고 있습니다. 노션은 지난달 세계 최초의 지식 노동 전용 AI 에이전트를 출시했고, 캔바도 자체 AI 모델을 탑재한 ‘크리에이티브 운영체제’를 선보였습니다. 피그마 역시 지난 7월 피그마 AI를 정식 출시했죠. 이처럼 ‘AI 승부수’를 띄운 3사 입장에서 한국은 새 기능을 확산하고 반응을 살펴볼 수 있는 최적의 테스트베드라는 평가입니다.
박대성 노션코리아 지사장은 <디지털 인사이트>의 질문에 “한국은 세계적으로 손꼽히는 AI 선도 시장”이라며 “최근 조사에서도 국내 지식 근로자들이 AI 도구 도입에 특히 적극적인 것으로 나타났다. 이처럼 높은 수용성과 빠르게 확산되는 인지도, 그리고 제품과 시장의 적합성이 맞물리며 한국은 아태지역 내 노션 AI 성장의 핵심 거점으로 자리매김했다”고 전했습니다.
👉 연관 콘텐츠: 첫 ‘AI 에이전트’ 선보인 노션이 한국 시장에서 꾀하는 것
두 번째로, 기업 측면에서 보면 ‘사일로’ 현상이 심하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사일로는 조직과 정보의 파편화를 뜻하는데요. 노션 조사에 따르면, 국내 IT 기업의 지식관리 시스템 도입률은 24%에 불과합니다. 글로벌 평균(42%)은 물론, 미국(53%)의 절반에도 못 미칩니다. 그만큼 조직 내 업무 분절로 인한 생산성 저하가 심각하다는 뜻이죠.
캔바와 피그마도 같은 문제를 지적합니다. 리암 피셔(Liam Fisher) 캔바 프로 디자인 글로벌 마케팅 총괄은 “팀이 점점 더 분산되고 비동기 협업 방식이 확산되며 유연한 콘텐츠 제작 도구의 필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진단했고요. 스콧 퓨(Scott Pugh) 피그마 아시아태평양 지역 영업 담당 부사장도 “한국은 강력한 크리에이터 생태계를 보유하고 있으며, 조직 내 원활한 협업을 위한 비주얼 플랫폼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협업툴의 궁극적인 목표는 업무 분절 해소입니다. 결국 한국 시장은 이들에게 ‘문제가 명확한 시장’, 즉 솔루션의 가치를 증명하기 좋은 시장인 셈이고요. 여기서 엔터프라이즈 시장 진출의 가능성을 발견했다는 분석입니다.
이처럼 협업툴 3사가 지난해부터 AI 고도화에 박차를 가하는 가운데, AI 수용도가 높고 기업의 사일로 문제가 명확하다는 점에서 한국을 ‘아태지역 최우선 시장’으로 판단, 본사 차원에서 적극 투자하는 상황입니다.
개인을 통해 기업으로, B2C2B 전략 뜯어보기

협업툴의 일반적인 확산 전략은 바텀업입니다. 즉, 개인 사용자가 먼저 제품의 가치를 체험한 뒤 조직 내에서 도입을 주도하는 방식이죠. 이처럼 개인 사용자를 통해 기업 고객을 공략하는 비즈니스 모델을 B2C2B라고 합니다.
미국에서도 이런 바텀업 전략을 활용 중인데요. 다만, 한국은 특유의 수직적이고 복잡한 의사결정 구조 탓에 기업 도입이 상대적으로 더 어렵다는 난관이 존재합니다. 때문에 실무자와 조직을 동시에 설득하는 양면 전술을 펼치고 있습니다.
양면 전술의 한 축은 개인 사용자입니다. 이를 위해 세 협업툴 모두 철저한 현지화를 진행했습니다. 노션은 2020년 첫 외국어로 한국어 버전을 출시했고, 피그마도 지난 5월 세 번째 비영어 현지화로 한국어를 택했습니다. 캔바도 지난해부터 국내 기념일에 맞춘 템플릿을 꾸준히 제작하는 동시에 지난 9월 캔바 AI에 한국어를 지원하기로 했죠.
리암 피셔 총괄은 “캔바의 한국 시장 현지화 전략은 ‘진정한 현지화(Truly Local)’에 기반한다”며 “단순한 번역을 넘어 제품, 콘텐츠, 마케팅, 파트너십 전반에 걸쳐 한국 사용자에게 완전히 현지화된 경험을 제공하는 데 주력하고 있다”고 전했습니다.
👉 연관 콘텐츠: “한국, 캔바의 혁신 시험대” 리암 피셔 캔바 마케팅 총괄 인터뷰
커뮤니티 활동도 같은 맥락입니다. 해외와 달리 국내에선 본사 주도 하에 커뮤니티 활동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실제 노션은 올해 다섯 차례의 오프라인 이벤트와 50회 이상의 워크숍을 진행했고, 캔바는 ‘캔바서더’ 프로그램을 운영하며 크리에이터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중입니다. 피그마는 ‘Friends of Figma’ 서울 챕터를 통해 온오프라인 밋업을 정기적으로 개최 중입니다.

동시에 다른 한편에선 기업의 의사결정권자를 설득하기 위한 활동도 펼치고 있습니다. 그중 하나가 브랜드 인지도 향상을 위한 대규모 캠페인입니다. 의외일 수도 있지만, 브랜드 인지도는 B2B 비즈니스에 도움이 됩니다. 직원이 회사를 설득하기가 더 쉬워지거든요. 예컨대 기업의 경영팀이 포토샵을 직접 쓰진 않더라도, 적어도 포토샵이 뭔지는 들어봐서 알기에 엔터프라이즈 모델을 쉽게 구독해주는 것과 같은 맥락입니다.
대표적으로 캔바는 지난 5월 국내 첫 대규모 캠페인 ‘뭐든지 만든다’를 진행했고요. 노션도 지난해 첫 브랜드 캠페인 ‘인생의 모든 순간에’를 론칭했습니다. 피그마의 경우, 대규모 캠페인을 진행하진 않았지만 지난 10월 국내 기업 버킷플레이스(Bucketplace)와 파트너십을 맺고 피그마 메이크를 활용한 해커톤인 ‘매이커톤(Make-a-thon)’을 열며 기업의 주목을 끌었죠.
뿐만 아닙니다. 기업 도입을 원활하게 할 제반 환경도 마련 중인데요. 노션의 경우 한국의 MS 365 중심 업무 환경을 고려해 마이크로소프트 팀즈 및 셰어포인트 연동 기능을 출시했고, 캔바는 지난 8월 간편 결제 서비스인 카카오페이와 네이버페이를 연동, 유료 구독을 더 쉽게 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습니다.
이처럼 협업툴 3사는 개인과 기업 두 축을 개별로 공략하는 전략을 취하고 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제품 개선과 커뮤니티 운영을 통해 개인 사용자를 대거 늘리고요. 다른 한편에서는 기업 의사결정권자의 인식을 바꿔 조직 내 도입이 더욱 수월한 환경을 조성하고 있습니다.
그 덕일까요. 가시적인 성과도 보입니다. 노션은 CJ올리브네트웍스와 GS건설, 효성 등 굵직한 기업과 파트너십을 맺었고, 캔바는 11개 시도 교육청과 협력해 전국 공립학교에 진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피그마도 카카오뱅크와 우아한형제들을 비롯한 코스피 200대 기업 중 3분의 1이 도입한 상황입니다.
기업 설득, 여전히 과제 많아
이들 협업툴의 국내 진출 소식에 실무자들은 환영하는 분위기입니다. 한 대형 IT 기업에서 부서장으로 재직 중인 A씨는 “그간 실무자들은 ‘업무의 유연성’에 있어서 늘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며 “노션이나 캔바, 피그마 같은 글로벌 협업툴의 국내 진출은 손쉽게 공유하고, 재창조하고, 협업할 수 있는 업무 구조가 형성된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말했습니다.
다만 전사적인 도입 가능성에 대해선 회의적인 의견을 내보였습니다. 크게 두 가지 이유가 있는데요. 하나는 ‘조직의 재정적인 여유’고, 또 하나는 ‘조직 구성원의 이해 충돌’입니다.
먼저, 기업은 협업툴을 도입할 때 단순 구독료 외에도 고려해야 할 비용적 요소가 많습니다. 기존에 사용하던 유사 솔루션이 있다면, 이를 교체하는 과정에서 발생하는 전환 비용(데이터 이전, 직원 교육 등)이 상당합니다.
또 구독형 서비스 특성상 장기적인 비용 지출 계획을 세워야 하는데, 국내처럼 보수적인 조직이라면 불확실한 미래 지출에 대해 부담을 느낄 수 있다는 설명입니다. 당장 가시적인 매출 증대 효과를 예측하기 어렵다는 점도 재정적 승인을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죠.
두 번째로 조직 내부의 복잡한 역학 관계도 문제입니다. 새로운 툴 도입은 기존 업무 프로세스를 변화시키고, 특정 부서나 개인의 업무 방식에 큰 영향을 미칩니다. 개인이 사용하듯 쉽게 결정할 사안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A씨는 “새로운 협업툴을 기업 차원에서 도입할 경우 학습에 대한 부담으로 변화에 반대하는 구성원들이 생겨난다”며 “이미 사용하던 툴이 있는 디자이너라면 피그마에 저항할 수 있고, 노션으로 인해 업무 기록 방식이 바뀌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부서도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갈등을 효과적으로 조율하고 설득하는 과정 없이는 새로운 툴이 조직 단위로 안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정리하면요. 최근 노션과 캔바, 피그마는 엔터프라이즈 고객을 늘리기 위해 본사 차원에서 국내 시장 투자를 아끼지 않고 있습니다. 이들의 행보에는 여러 공통점이 발견됩니다. 대표적으로 1)제품의 현지화 2)커뮤니티 운영 3)브랜드 마케팅 등인데요.
이는 실무자를 먼저 설득해 전사적 도입을 꾀하는 전형적인 ‘B2C2B’ 비즈니스 전략으로 풀이되고요. 특히 ‘너그러운 실무자’와 ‘보수적인 기업’이라는 상반된 특성을 동시에 공략하기 위해 양면 전술을 펼치고 있다는 점이 주목할 만한 특징입니다.
다만 전사적인 도입이 결코 쉬운 과제가 아닌 만큼, 이들이 얼마나 빠르게 한국 기업 고객을 늘려나갈지, 또 앞으로 어떤 전략을 펼쳐나갈지 계속해서 살펴봐야겠습니다.



댓글 0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