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서울 국제 도서전에서는 다섯 시간을 머물렀습니다. 부스를 천천히 돌면서 잘된 부스의 공통점을 정리했죠. 그 기록은 이 글(>서울국제도서전2025, 마케팅 관점에서 본 잘된 부스의 공통점)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올해는 달랐어요. 둘째 날 오후 4시에 들어가서, 한 바퀴를 제대로 돌지도 못하고 나왔거든요. 늦은 시간이었고, 지쳐 있었고, 무엇보다 사람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러니 지금부터 쓰는 이야기는 도서전 전체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 ‘그런 조건의 관람객 한 명’에게 올해 도서전이 어떻게 작동했는지에 대한 기록에 가까워요.
그런데 그 한 명에게 분명하게 작동한 게 하나 있었습니다. 가장 큰 부스들 앞에서 저는 끝내 지갑을 열지 못했고, 가장 작은 부스에서 책 몇 권을 샀어요. 그 간극이 올해 제가 가져온 유일한, 그러나 꽤 또렷한 입력값입니다.

1. 올해 서울 국제 도서전, 가장 큰 부스에서는 지갑을 열지 못했다
올해 대형 부스들은 정말 잘 만들어졌어요. 컨셉이 분명했고 규모가 컸습니다. 그게 곧 ‘여기가 중심’이라는 공기를 만들었고, 사람이 몰렸어요.

민음사 부스가 그 정점이었습니다. 출판 시장 전반이 위축된 가운데 민음사는 2025년 매출 206억 원, 영업이익 약 42억 원으로 1년 새 영업이익을 70% 넘게 끌어올렸어요. 노벨문학상을 받은 한강 작가의 책을 한 권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 이만큼 성장한, 업계에서 보기 드문 출판사입니다. 올해 서울국제도서전에서 화제와 실적의 한가운데 선 이름이었고, 부스에도 그 화제가 그대로 옮겨 와 있었어요. 사람에 둘러싸여서, 솔직히 부스 안에서 빠져나오는 것조차 쉽지 않았습니다.


- 2025년 매출 206억 원 (전년 대비 +23%)
- 영업이익 약 42억 원 (전년 대비 +72.8%)
- 한강 작가 도서를 보유하지 않고도 성장 — 같은 기간 단행본 1·2위 출판사는 매출·이익 모두 감소
출처: 한국경제 등 종합

밀리의 서재가 창립 10주년을 기념해 꾸민 ‘밀리하우스’도 마찬가지였어요. 집을 통째로 옮겨 놓은 듯한 체험형 부스였는데, 저녁 6시가 넘어서도 입장을 기다리는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습니다. 줄을 보고 구경할 엄두가 나지 않아 그냥 지나쳤어요.



그나마 들어가서 구경 정도 할 수 있었던 대형 부스에서도 굿즈는 대부분 품절이었고요.

장르문학 전문 출판사 안전가옥은 ‘장르덤프’라는 컨셉으로 부스를 차렸습니다. 장르를 뒤죽박죽 쏟아낸다는 발상에, 표지만 보고 골라도 굿즈 때문에 사도 괜찮다는 메시지를 얹은 부스였어요.



눈길을 끄는 데는 분명히 성공했죠. 그런데 이번에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제대로 들여다보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습니다.
대형 부스 몇 곳을 지나고 나니 솔직하게 조금 질리는 마음이 들더라고요. 분명히 잘 만든 공간들인데, 잘 만들어서 사람이 몰렸고, 사람이 몰려서 저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하지 못했거든요.
2. 붐빈다는 신호는 언제 등을 떠미는 신호가 될까
여기서부터가 마케터로서 멈춰 서게 된 지점이에요.
붐비는 부스는 처음엔 강력한 신호입니다. 줄이 길고 사람이 많다는 건 ‘여기가 볼 만한 곳’이라는 사회적 증거니까요. 사람은 남들이 모이는 곳에 끌립니다. 그래서 큰 부스들은 도달이라는 목표를 아주 잘 달성했어요. 멀리서도 보이고, 화제가 되고, 기억에 남았죠. 이건 깎아내릴 일이 아니라 진짜 성과입니다.


문제는 같은 인파가 어느 지점을 넘어서면 정반대로 작동한다는 거예요. 소매 공간의 혼잡을 다룬 소비자 연구들은 비교적 일관되게, 매장이 지나치게 붐비면 쇼핑 만족도와 구매 의향이 떨어진다고 말합니다. 들어갈 수 없고, 볼 수 없고, 살 수 없으면, 끌어당기던 신호가 등을 떠미는 장벽으로 뒤집히거든요. 적어도 그날 오후의 저에게는 정확히 그렇게 작동했습니다.
그러니까 도달과 전환은 같은 축이 아니에요. 멀리 퍼뜨려 기억에 남기는 일과, 한 사람을 멈춰 세워 지갑을 열게 하는 일은 서로 다른 목표이고 다른 지표를 가집니다.
목표는 화제와 기억
신호는 줄·인파·SNS
가장 잘하는 일은 멀리 퍼뜨리기
목표는 구매와 관계
신호는 체류·대화·재방문
가장 잘하는 일은 한 사람 붙잡기
어느 방법이 더 맞거나 어느 쪽이 더 우월하다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그날 대형 부스를 끝까지 즐긴 다른 관람객에게는 도달이 곧 만족이었을 수도 있고요. 다만 규모를 키워 도달을 사면, 그 규모가 만든 인파만큼 한 사람을 붙잡을 자리는 좁아진다는 것. 이 구조는 표본이 저 하나든 백 명이든 그대로 성립합니다.
3. 내가 책을 산 곳은 따로 있었다
그날 제가 산 책은 모두 ‘책마을’에서 였습니다. 독립출판사와 아트북을 모아 놓은 공간인데, 올해는 국내외 110여 곳이 참여해 역대 가장 큰 규모로 꾸려졌습니다. 이곳도 한산하진 않았어요. 그래도 대형 부스만큼은 아니었고, 무엇보다 공기가 달랐습니다.

스태프들이 지나가는 손님 한 명 한 명에게 인사를 건네고, 자기 책을 직접 소개했어요. 어떤 마음으로 만든 책인지 짧게 들려주는데, 그 열기가 느껴져서 안 사고 그냥 나오기가 어려웠습니다. 큰 부스에서는 사람에 떠밀려 아무것도 못 한 채 나왔는데 각 출판사가 어떤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지 뚜렷하게 보이고, 부스마다 구경하고 있으면 곧장 설명을 해주시는 스텝 분들 덕분에 딥다이빙 하는 재미도 있었습니다. 그러니 지갑이 열리더라고요. 저는 주로 정체성이 명확한 부스에서 오래 머물렀고, 그만큼 구매로 연결됐습니다.



많이(12,000)귀여워(700) 라는 뜻으로 소비자가도 12,700원으로 맞췄다는 말이 인상 깊었어요.
여기서 ‘작은 부스가 이긴다’는 결론으로 건너뛰면, 그건 또 다른 단순화가 될 거예요. 대형부스가 커서 가능했던 면과 반면에 책마을이 작아서 가능했던 면도 분명히 있으니까요. 핵심은 크기가 아니라, 그 부스가 도달이 아니라 전환의 온도를 설계해 두었다는 점입니다. 한 사람과의 짧은 대화에 자기 자원을 썼고, 그 대화가 구매가 됐어요.
그래서 이미 충분한 도달을 가진 브랜드라면, 질문이 ‘어떻게 더 키울까’에서 ‘키워서 모은 사람들 속 어디에 전환의 온도를 따로 둘까’로 바뀌어야 합니다. 큰 노출은 화제를 위해 그대로 두되, 그 안에 한 사람과 눈을 맞추는 작고 밀도 높은 접점을 따로 설계하는 식으로요. 개인적으로 안전가옥은 섹션마다 직원들이 상주해서 끊임없이 잼얘(재밌는 얘기, 책의 줄거리)를 해주시는 모습이 인상 깊었습니다. 직원분 자체가 이야기꾼이 되고 그 주위로 사람들이 몰렸어요, 그럼 직원분은 샘플 도서를 한 권씩 쥐어주셨죠. 약장수를 떠올리게 하는 판매방식이지만 분명 효과는 있었을 거예요. 어느 부스를 그대로 흉내 내라는 말은 아니에요. 우리 브랜드가 이미 가진 규모 안에서, 사람을 멈춰 세울 자리가 어디인지를 찾자는 쪽에 가깝습니다.

서울국제도서전을 나오면서, 성공을 줄의 길이로 읽던 제 습관을 한 번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줄이 길수록 잘된 것 같지만, 정작 그날 몇 명이 멈춰 서서 지갑을 열었는지는 줄의 길이가 알려주지 않으니까요. 올해 제가 가져온 입력값은 시선의 전환입니다. 정답이라기보다는, 한 번 바꿔 끼워 볼 만한 렌즈로요.
📌 오늘의 소마코 콕
SOMAKO
붐빈다는 신호에는 임계점이 있어요. 끌어당기던 인파가 어느 순간 등을 떠미는 장벽으로 바뀝니다.
도달과 전환은 다른 축이에요. 규모를 키우면 더 멀리 닿지만, 그만큼 한 사람을 붙잡을 자리는 좁아집니다.
이미 도달을 가진 브랜드일수록, 전환의 온도를 어디에 따로 둘지를 먼저 설계해야 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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