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슐랭’ 인증은 전 세계 어디에서나 특별한 맛을 인정받는 식당이라는 공인된 인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한국에서도 미슐랭 맛집들은 줄을 서서 기다려야만 겨우 맛볼 수 있다. 그런데 이 미슐랭이 미쉐린 타이어 회사와 연관 있는 것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사실 둘은 같은 프랑스어 ‘Michelin’을 다르게 읽은 것일 뿐이다. 왜 타이어 회사의 이름이 인증된 맛집의 상징이 되었을까?

이야기는 1900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프랑스 도로에는 자동차가 3천 대도 되지 않았다. 타이어를 만들던 미쉐린 형제, 에두아르와 앙드레에게 이건 냉정한 숫자였다. 자동차가 3천 대라면 타이어를 살 사람도 그만큼뿐이다. 상세페이지 카피를 아무리 다듬어도, 광고 소재를 아무리 잘 만들어도 팔 대상 자체가 없다.
1. 광고 대신 ‘떠날 이유’를
제품을 잘 팔려면 당연히 광고를 해야만 한다. 미쉐린 형제도 처음에는 그렇게 했다. 1898년, 타이어를 쌓아 만든 캐릭터 ‘비벤덤’이 등장한 포스터를 내걸었다. 못과 깨진 유리가 담긴 잔을 들고 건배하는 모습으로, 미쉐린 타이어는 길 위의 장애물도 마셔버린다는 메시지였다. 지금도 쓰이는 그 ‘미쉐린 맨’이다.

하지만 광고로 풀 수 없는 문제가 있었다. 아무리 좋은 타이어라도 차가 달리지 않으면 팔리지 않는다. 그래서 형제는 광고를 더 하는 대신, 자동차를 타고 나갈 이유를 만들기로 했다. 그렇게 나온 것이 1900년 8월 무료로 배포한 『기드 미쉐린(Guide Michelin)』이다. 첫 무료판은 약 3만 5천 부가 뿌려졌다. 자동차가 3천 대인 나라에, 그 열 배가 넘는 책자를 공짜로 돌린 셈이다. 자동차와 타이어 수요를 늘리겠다는 분명한 의도에서 나온 과감한 투자였다.
2. 초보 운전자의 생존 매뉴얼

책자에 담긴 내용을 보면 형제의 의도가 더 분명해진다. 첫 판에는 지도와 함께 타이어를 고치고 교체하는 방법, 정비소와 호텔, 주유소 목록이 실렸다. 식당 평가서가 아니라 ‘운전 생존 매뉴얼’에 가까웠다. 당시 자동차 여행은 모험이었다. 어디서 기름을 넣을지, 타이어가 터지면 어떻게 할지, 밤에는 어디서 잘지 모르는 길을 떠나기는 쉽지 않다. 특히나 차 뒤에 ‘초보운전’ 딱지를 크게 붙이고 다녀야만 하는 운전 초심자에게는 정말 생존을 위한 필수 가이드가 되었을 것 같다. 미쉐린은 그 막막함을 지워줬다. 타이어가 좋다는 말 대신, 떠나도 괜찮다는 확신을 판 것이다.
3. 고객 수가 아니라 주행 거리
여기서 핵심은 타이어라는 제품의 성격이다. 타이어는 한 번 사면 끝나는 물건이 아니다. 달릴수록 닳고, 닳으면 다시 사야 한다. 새로운 고객에게 제품을 판매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재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 기왕이면 그 재구매의 주기가 짧아지면 짧아질수록 유리해지는 건 당연한 이치이다.

그러니 미쉐린 형제가 늘려야 했던 건 고객의 수만이 아니었다. 고객이 달리는 거리였다. 운전자가 더 멀리, 더 자주 떠날수록 타이어는 더 빨리 닳고 더 자주 팔린다. 마케팅에서는 시장을 키우는 방법을 흔히 새로운 사용자를 찾는 것, 새로운 용도를 만드는 것, 기존 사용자가 더 많이 쓰게 하는 것으로 나눈다. 미쉐린 가이드는 제품을 더 팔려고 애쓰지 않고, 제품이 더 많이 쓰이는 상황을 만들었다.
4. 작업대 받침에서 별까지
이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뒷장이 있다. 무료 배포는 1920년까지 이어졌는데, 앙드레 미쉐린이 한 타이어 가게에 들렀다가 가이드가 작업대 받침으로 쓰이는 걸 봤다고 한다. 그는 사람은 돈을 내고 산 것만 존중한다며 가이드를 유료로 바꿨다. 이후 미쉐린은 익명의 평가원을 두고 1926년 처음으로 식당에 별을 주기 시작했다. 공짜 책자가 신뢰받는 평가서로 바뀐 순간이다.

미쉐린의 별 세 개는 그 식당을 위해 일부러 여행을 떠날 만하다는 의미라고 하니, 타이어 회사가 맛집을 추천하는 맥락이 이제야 이해가 된다. 별은 더 정교한 ‘떠날 이유’였던 것이다. 처음부터 맛집의 권위를 노린 건 아니었지만, 사람들을 길 위로 불러낸다는 목적은 125년 넘게 그대로다.
5. 100년 넘게 살아남은 지혜
이런 발상이 미쉐린만의 특이한 사례였던 것도 아니다. 비슷한 시기인 1895년, 미국 농기계 회사 존디어는 농부들을 위한 잡지 『더 퍼로우(The Furrow)』를 냈다. 잡지는 트랙터 광고 대신 농사를 더 잘 짓는 방법을 다뤘다. 놀랍게도 이 잡지는 130년 가까이 지난 지금도 발행되고 있고, 편집 지면에서는 회사 이야기를 거의 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지켜왔다.

고객이 하는 일을 더 잘하게 도우면 그 일에 쓰이는 제품이 자연스럽게 팔린다는 것은 말이 된다. 다만 시장이 우리만의 독점이 아니라면 우리 제품의 구매로 이어지게 하는 노력이 결합되었을 때 더 유효하게 작동할 것이다. 존디어도 그 연결 고리를 놓치지 않았다. 잡지는 존디어 대리점이 자기 이름을 걸고 단골 농부들에게 보내는 방식으로 배포됐다. 도움은 넓게 주되, 그 도움이 도착하는 곳에는 늘 존디어가 있었다.
6. 스마트폰 속의 미쉐린 가이드
오늘의 미쉐린 가이드는 어떤 모습일까? 나이키 런 클럽 앱은 초보 러너들이라면 거의 무조건 깔고 시작하는 앱이다. 무료 앱인데도 정말 잘 만들어져 있다. 코치의 음성 안내를 받으며 달리는 가이드 런, 몇 주짜리 훈련 계획, 친구와의 챌린지가 담겨 있다. 혼자서는 나가기 싫은 날에도 달릴 이유를 만들어준다.

그리고 앱에는 신발별로 달린 거리를 기록하는 기능이 있다. 거리가 쌓이면 이제 신발을 바꿀 때라는 걸 알려주고, 나이키는 자연스럽게 새 러닝화를 안내한다. 많이 달리면 더 자주 러닝화를 바꾸게 될 거라는 맥락이 정확히 그 옛날의 미쉐린 가이드와 딱 들어맞는다는 것이 참으로 신기할 뿐이다. 1900년 미쉐린 형제가 설계한 구조가 125년 뒤 스마트폰 안에서 그대로 작동하고 있다.
7. 우리 제품이 필요한 이유를 만들어주는 장치
우리는 종종 제품을 더 잘 설명하는 데 모든 힘을 쏟는다. 상세페이지를 고치고, 카피를 바꾸고, 광고 소재를 테스트한다. 물론 필요한 일이다. 하지만 시장이 작거나 성장이 멈췄다면,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따로 있다.
우리 제품을 팔기 위해서, 우리 제품이 필요한 이유와 명분을 만들어줄 수 있는 장치는 무엇이 있을까 한번 생각해볼 일이다. 분명 대놓고 우리 제품을 홍보하지 않아도 스스로 우리 제품을 찾는 충성고객을 만들 수 있는 방법이 될지도 모른다. 미쉐린은 타이어를 팔지 않았다. 떠날 이유를 팔았다. 과연 우리는 무엇을 팔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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