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에디터가 자주 찾는 역삼동의 작고 아늑한 펍이 하나 있습니다. 혼자서 조용히 잔을 기울이기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편하게 맥주 한잔하며 하루를 마감하기도 좋은 비밀 아지트 같은 곳이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만약 내 애정이 담긴 소중한 공간이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다면 어떨까요? 아마 일상의 소중한 한 조각을 잃어버린 듯 쓸쓸할 겁니다.
오늘 소마코에서는 사라질 위기에 처했던 아일랜드 한 시골 마을의 펍, 그리고 그 아지트를 지켜낸 주민들과 하이네켄의 아주 특별한 이야기를 전해드리려고 합니다.
1. 킬텔리의 마지막 펍

무대는 아일랜드 리머릭주의 작은 마을 킬텔리(Kilteely). 이 마을은 이미 상점을 잃었고, 우체국도 문을 닫았다. 마을에 남은 마지막 공용 공간은 바로 ‘더 스트리트 바(The Street Bar)’라는 펍 하나. 그런데 주인이 은퇴를 앞두면서 그마저 사라질 참이었다. 그러자 주민 26명이 돈을 모았다. 30만 유로(현재 환율로 약 한화 4억 7천만 원). 펍을 운영해본 적도, 맥주 한 잔 제대로 따라본 적도 없는 평범한 이웃들이 동네 술집을 통째로 사버린 것이다.
이 무모하지만 감동적인 도전을 눈여겨본 건 글로벌 맥주 브랜드 하이네켄이었다. 하이네켄은 단순히 영상을 찍는 구경꾼에 그치지 않았다. 요식업 경험이 전혀 없는 주민들을 위해 영업 자문과 전문 바텐더 교육, 필수 장비를 직접 지원하며 펍이 자립하고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함께 다졌다.

그리고 이 진정성 있는 재활성화 과정을 아일랜드 감독 가 오록(Gar O’Rourke)과 함께 다큐멘터리 카메라이자 브랜드 캠페인으로 담아냈다. 제목은 「죽기를 거부한 펍(The Pub That Refused to Die)」. 하이네켄은 여기에 대형 광고 예산을 붙여 세상에 알렸다.
2026년 칸 라이언즈에서 이 작업은 크리에이티브 전략(Creative Strategy) 부문 그랑프리를 받았다. 하이네켄은 그해 ‘올해의 크리에이티브 브랜드’로 뽑혔고, 그랑프리 2개를 포함해 총 31개의 라이언을 쓸어 담았다.
하이네켄은 맥주 제품을 단 한 컷도 직접 광고하지 않고, 오직 액션과 스토리텔링만으로 칸을 휩쓸었다. 방식은 의외로 단순하다. 자사 제품을 자랑하는 대신, 맥주가 소비되던 ‘장소’, 사라지기 직전의 동네 펍 하나를 실제로 되살려내고 그 실재하는 과정을 한 편의 서사로 완성했다.
맥주 회사가 맥주를 광고하지 않았다. 대신 맥주가 팔리는 ‘장소’를 직접 지키고 살아 숨 쉬게 만들었다. 심사위원단이 최고점을 준 건 필름의 감동에 그치지 않고, 브랜드를 실질적 ‘문제 해결자’로 위치시킨 전략의 논리와 진정성이었다. 부문 이름이 하필 ‘크리에이티브 전략’이라는 사실이 이미 그 답을 말해주고 있다.
2. 2,119라는 숫자를 다시 읽으면
이 캠페인을 미담이 아니라 전략으로 읽으려면, 배경에 깔린 숫자 하나를 원자료까지 따라가 봐야 한다. 2025년 7월, 아일랜드 주류산업그룹(DIGI)이 의뢰한 보고서가 나왔다. 작성자는 더블린시티대학 명예교수인 경제학자 앤서니 폴리(Anthony Foley). 내용은 이랬다. 2005년부터 2024년까지 아일랜드에서 문을 닫은 펍이 2,119곳. 전체의 약 4분의 1이다. 주류 판매 면허 수는 8,617개에서 6,498개로 줄었다. 20년간 해마다 평균 106개꼴로 사라진 셈이다. 그리고 이 보고서가 던진 진짜 경고는 집계가 아니라 전망이었다. 개입이 없으면 앞으로 최대 1,000곳이 더 문을 닫을 수 있다.
눈여겨볼 대목은 지역 편차다. 폐업률이 가장 높은 곳이 바로 리머릭주, 20년간 37.2% 감소였다. 킬텔리가 있는 그 카운티다. 하이네켄이 살린 펍은, 아일랜드에서 술집이 가장 빨리 사라지는 지역의, 사라지기 직전의 한 곳이었다. 눈물샘을 자극하려고 아무 마을이나 고른 게 아니라, 통계의 진앙지에서 골라낸 장면이라는 뜻이다.
맥주를 만드는 회사 입장에서 이 숫자는 ‘시장이 좀 줄었다’가 아니라 다르게 읽힌다. 슈퍼마켓 진열대는 그대로여도, 펍이 사라지면 하이네켄이라는 브랜드가 ‘한 잔의 의식’으로 소비되던 자리 자체가 통째로 없어진다는 것이다. 이 숫자는 매출 그래프가 아니라 유통 채널이 물리적으로 소멸하고 있다는 지도였다.
3. 브랜드가 지켜야 할 것이 제품이 아닐 때
이 지점에서 마케터 관점에서 던져야할 질문이 분명해진다. 브랜드는 무엇을 자기 자산으로 봐야 하는가?
맥주 브랜드의 교과서적 자산은 제품과 그 인지도다. 그런데 펍에서 마시는 한 잔과 편의점에서 캔으로 마시는 한 잔은, 같은 액체지만 전혀 다른 상품이다. 앞의 것에는 대화와 우연한 만남, ‘우리 동네’라는 맥락이 붙는다. 마케팅에서 ‘온-트레이드(on-trade, 업장 판매)’라 부르는 이 채널은 맥주 브랜드에 단순한 매출처가 아니다. 브랜드의 의미가 만들어지고 반복 재생산되는 서식지(habitat)다. 서식지가 사라지면 그 안에 살던 종(種)이 위태로워진다. 하이네켄이 지킨 건 결국 자기 브랜드가 숨 쉬는 공기였다.
가장 좋은 크리에이티브는 언제나 진짜 사람의 이야기에서 출발한다.
The best creative work starts with a real human story.
– 출처 : 게르 로(Ger Roe), 퍼블리시스 더블린 (LBBOnline, 2026)
하이네켄은 ‘우리 제품이 왜 좋은가’를 설득하지 않았다. ‘제품이 좋게 소비되던 장소가 왜 사라지면 안 되는가’를 증명했다. 전자는 광고고, 후자는 브랜드에 대한 인프라 투자다. 하이네켄이 킬텔리에 실제로 건넨 것도 필름값만이 아니었다.
바텐더 교육 프로그램(‘Ahhh-cademy’), 실무 경영 가이드, 운영 지원. 나아가 펍을 되살리려는 예비 주인들을 위한 온라인 자료 허브(loveofpubs.com)까지 만들었다. 다큐 한 편 찍고 끝낸 게 아니라, ‘동네 펍 되살리는 법’이라는 실행 매뉴얼을 브랜드가 떠안았다. 하이네켄의 스토리텔링 마케팅이 한 편의 감동 영상으로 끝나지 않은 건 바로 이 지점 때문이다. 왜 이 작업이 필름 부문이 아니라 전략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았는지도 여기서 설명된다. 감동은 도구였고, 되살아난 펍이 결과였다.
4. 장소를 지키자 무엇이 되돌아왔나?

제품 대신 ‘제품이 팔리는 장소’를 지켰을 때 브랜드에 되돌아온 것을 세 층위로 나눠볼 수 있다.
가장 먼저 돌아온 건 채널 그 자체다. 더 스트리트 바는 다시 문을 열었고, 킬텔리 이후 적잖은 마을들이 같은 방식으로 자기 동네 펍을 사들이는 데 성공했다. 광고가 만든 게 인지도가 아니라, 폐업 곡선을 되돌린 실물 결과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다음은 얻은 미디어(earned media)다. 이 캠페인은 크리에이티브 전략 그랑프리 외에도 PR·다이렉트·B2B·엔터테인먼트 4개 부문에서 브론즈 라이언을 받았다. 다큐멘터리는 2026년 2월 더블린 국제영화제에서 먼저 상영됐다. 광고가 영화제 초청작이 되는 순간, 브랜드는 ‘봐줘서 고마운 메시지’에서 ‘보러 오는 콘텐츠’로 신분이 바뀐다. 사람들이 돈 내고 봐줄 무언가를 만들면, 매체비로 억지로 밀어 넣던 노출은 부수적인 것이 된다.
마지막은 브랜드의 의미다. 하이네켄은 오래전부터 ‘펍’과 ‘사람 사이의 연결’을 자기 자리로 삼아온 브랜드다. 이 캠페인은 그 포지셔닝을 슬로건이 아니라 행동으로 증명했다. 말로 “우리는 펍을 사랑합니다”라고 백 번 외치는 것과, 사라지는 펍 하나를 실제로 되살리는 것 사이의 신뢰 격차는 크다.
5. 우리에게 던져볼 질문 세 가지
대부분의 브랜드는 자기 제품만 본다. 제품의 기능, 가격, 인지도. 그러나 제품은 진공이 아니라 어떤 장소·습관·맥락 안에서 소비된다. 그리고 그 맥락이 무너질 때, 제품이 아무리 좋아도 팔릴 자리가 없어진다.
그러니 브랜드를 가진 사람이라면 스스로에게 세 가지를 물어볼 만하다. 1) 우리 제품이 ‘가장 좋은 모습으로’ 소비되는 장소나 습관은 어디인가? 2) 그 장소가 지금 조용히 무너지고 있지는 않은가? 3) 그리고 그 무너짐을 막는 주체가 ‘우리’일 수는 없는가?
수많은 브랜드 전략 사례가 ‘우리 제품이 왜 최고인가’를 반복하는 동안, 하이네켄은 질문 자체를 바꿨다. 무엇을 파느냐가 아니라 그것이 어디서, 어떻게, 누구와 함께 소비되느냐를 지킨 것이다. 이 작업이 유독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필름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그 질문의 전환이 정확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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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 이 글의 원고를 편집하는 내내 자주 들르던 역삼동의 작은 펍이 머릿속을 스쳤습니다. 내가 그곳을 좋아했던 건 잔에 담긴 맥주 때문이었을까요, 아니면 마음 편히 쉬어갈 수 있던 그 공간 때문이었을까요? 아마 공간이 사라진다면, 그곳에서 마시던 맥주 맛도 더는 같지 않을 겁니다.
창의적 문제해결 방법인 트리즈(TRIZ)에는 ‘이상성(Ideality)’이라는 흥미로운 철학이 있습니다. 가장 이상적인 형태는 시스템 실체는 사라지더라도, 우리가 그 시스템에 원했던 ‘기능’은 그대로 이루어지는 상태라고 말하죠. 브랜드가 만드는 제품이나 서비스는 결국 고객이 원하는 ‘가치’를 실현해 주는 수많은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물리적인 제품은 언젠가 바뀔 수 있지만, 고객이 경험하는 본질은 변하지 않는 법이죠.
하이네켄이 맥주 한 잔 직접 보여주지 않고도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들이 지켜낸 건 눈앞의 ‘제품’이 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서로를 보듬던 ‘공유된 가치’였습니다.
- 오늘 이야기를 다룬 10분 남짓의 영상입니다. 시간날 때 보시면서 여러분이 제품이 고객과 공유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참고 자료 6건
- Adweek (2026), “Heineken Wins Big Again Among 7 Grand Prix Winners at Cannes Lions 2026 Day 4”, https://www.adweek.com/creativity/heineken-wins-big-again-among-7-grand-prix-winners-at-cannes-lions-2026-day-4/
- Contagious (2026), “Cannes Lions 2026: Creative Strategy winners”, https://www.contagious.com/en/article/cannes-lions-2026-creative-strategy-winners-025db17c384a4501829e908baefc10fe
- THINKHOUSE (2026), “Heineken® Ireland Wins Cannes Lions Grand Prix for ‘The Pub That Refused To Die’”, https://www.thinkhousehq.com/news/heineken-ireland-celebrates-grand-prix-win-at-cannes-lions
- The HEINEKEN Company (2026), “HEINEKEN wins big at Cannes, with Heineken® crowned Creative Brand of the Year”, https://www.theheinekencompany.com/newsroom/heineken-wins-big-at-cannes-with-heineken-crowned-creative-brand-of-the-year-driven-by-a-culture-of-radical-collaboration/
- RTÉ (2025), “Over 2,100 pub closures in last 20 years, report finds”, https://www.rte.ie/news/ireland/2025/0714/1523333-pub-closures-report/
- Drinks Industry Group of Ireland / Anthony Foley, DCU (2025), “New report finds over 2,100 pubs have closed since 2005”, https://www.drinksindustry.ie/news/news-and-press/press-release-new-report-finds-over-2100-pubs-have-closed-since-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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