훔친 폰으로 계좌가 털리는 사고를, 페루의 은행 BCP는 새 기기 한 대 만들지 않고 막았습니다. 이미 전국 가게마다 깔려 있던 카드 결제 단말기, 그 흔한 POS 기계의 용도만 ‘결제를 받는 기계’에서 ‘계좌를 잠그는 창구’로 다시 정의한 겁니다. 2026년 칸 라이언즈 크리에이티브 데이터 부문 그랑프리가 바로 이 팀, 아무것도 새로 만들지 않은 팀에게 돌아간 이유죠. 광고계가 두고두고 곱씹는 발상의 전환 사례입니다.

이게 놀라운 건, 우리 손이 늘 반대로 움직이기 때문이에요. 새 캠페인 브리프가 떨어지면 새 채널을 열고, 새 소재를 찍고, 새 예산 라인을 잡습니다. ‘없던 걸 만든다’가 마케팅의 기본값처럼 굳어 있으니까요. 그런데 이번 그랑프리를 만든 BCP(Banco de Crédito del Perú)와 대행사 Circus Grey는 정확히 그 반대편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새 앱도, 새 하드웨어도, 새 매장도 없었어요. 이 글은 그 한 번의 ‘용도 재정의’가 왜 새 인프라 열 개보다 강했는지, 그리고 지금 당신 책상 위 어떤 자산에 같은 수를 둘 수 있는지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1. 돈을 받던 기계가, 돈을 잠그는 기계가 되다

페루에서는 하루에 4,000대가 넘는 휴대폰이 도난당합니다. 진짜 문제는 그다음이에요. 요즘 폰에는 은행 앱이 깔려 있잖아요. 그래서 범인은 훔친 폰으로 몇 분 안에 피해자의 계좌를 비웁니다. 그런데 정작 피해자는 은행 긴급 전화조차 걸 수가 없어요. 계좌를 잠글 유일한 도구인 그 폰이 방금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긴급 대응 수단과 도난당한 물건이 같은 하나라는 것, 이 지독한 역설이 문제의 핵심이었습니다.
BCP가 내놓은 답이 SOS POS예요. 폰을 잃은 사람이 가까운 상점에 들어가, 카드 단말기 키패드에 자기 신분증 번호와 PIN을 입력합니다. 그러면 바로 그 자리에서 계좌가 즉시 잠깁니다. 앱도, 전화도, 새 기기도 필요 없어요. 결제를 ‘받던’ 단말기가, 계좌를 ‘잠그는’ 창구로 바뀐 겁니다. 먼저 영상을 한번 보세요. 정말 기발한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눈여겨볼 건 규모와 밀도예요. 참여 매장이 페루 전역 17,500곳을 넘습니다. 식료품점, 약국, 철물점, 꽃집, 미니마트처럼 사람들이 매일 지나치는 곳들이죠. BCP가 잡은 목표는 이거였어요. 대부분의 페루인이 2분 안에 닿을 거리에 ‘계좌 잠금 창구’를 두는 것. 게다가 이 방식은 오픈소스로 공개돼서, 페루에 깔린 130만 대 이상의 POS 단말기로 확장될 여지까지 열어뒀습니다.
결과는 캠페인 리포트에 그대로 옮겨 쓰기 좋은 숫자로 돌아왔어요. 시행 첫 4개월 동안 고객 자산 약 780만 달러를 지켜냈고, 월간 도난 신고는 48% 줄었습니다. 은행을 향한 긍정 여론은 83% 늘었고, 지켜낸 자산은 도입 비용의 75배를 넘었어요. 새 인프라를 깔지 않았으니 비용은 낮았고, 효과는 이미 깔려 있던 밀도를 그대로 탄 겁니다.
그랑프리 수상작은 아이디어의 아름다운 단순함과 데이터의 상상력 있는 사용으로 돋보였습니다 — 데이터를 지키기 위해 데이터를 쓴 거죠.
“The Grand Prix winner stood apart for the beautiful simplicity of its idea and the imaginative use of data – data used to protect data!”
– 출처 : Anupriya Acharya, 칸 라이언즈 2026 크리에이티브 데이터 심사위원장
2. 새 단말기가 아니라 용도 재정의였던 이유

기술만 놓고 보면 이 캠페인은 초라할 만큼 단순해요. 단말기가 신분증 번호와 PIN을 받아 계좌를 잠그는 처리 자체는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진짜 영리한 지점은 다른 데 있었어요. Circus Grey는 이미 깔린 단말기 망이, 마케터가 가장 목말라하는 두 가지를 이미 풀어둔 상태라는 걸 알아본 겁니다.
하나는 유통과 도달이에요. 17,500곳, 2분 거리라는 밀도를 새로 만들려면 몇 년의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듭니다. 그런데 POS 망은 그 밀도를 이미 갖고 있었어요. 다른 하나는 친숙함과 신뢰입니다. 사람들은 카드 단말기에 뭔가를 입력하는 동작을 이미 알고 있어요. 배우는 데 드는 비용이 0에 가깝죠. 새 앱을 깔게 하고 사용법을 익히게 만드는, 그 지긋지긋한 온보딩 구간을 통째로 건너뛴 겁니다.
그러니까 이건 없던 걸 발명한 일이 아니라, 이미 있던 걸 다시 정의한 일이었어요. ‘돈을 받는 기계’라는 굳은 정의를 지우고 ‘돈을 잠그는 기계’라고 다시 쓴 것뿐입니다. 이 캠페인이 대표적인 발상의 전환 사례로 회자되는 이유가 여기 있어요. 판을 새로 깐 게 아니라, 판 위에 이미 놓여 있던 말의 용도를 바꿔 둔 거니까요.

마케팅 안에도 같은 결의 사례가 있습니다. 스포티파이의 연말 Wrapped를 떠올려 보죠. 그 캠페인의 재료인 청취 기록은, 원래 추천 알고리즘을 돌리려고 ‘이미’ 쌓고 있던 데이터예요. 이걸 위해 따로 모은 데이터가 아니었죠. 스포티파이가 한 일은 그 데이터의 용도를 ‘추천용’에서 ‘연말에 나눠 보는 콘텐츠용’으로 다시 정의한 것뿐이에요. BCP가 신고·위치 데이터를 계좌를 지키는 방패로 다시 쓴 것과 같은 동작이죠. 자산은 그대로 있었고, 바뀐 건 그 자산을 무엇을 위한 것으로 보느냐였습니다.
이 사례에서 챙겨 갈 교훈은 하나입니다. 당신의 가장 저평가된 자산은, 아직 없는 새 채널이 아니라 용도가 굳어버린 기존 자산입니다. ‘이건 원래 이런 거’라는 정의가 강할수록, 그 자산은 다른 쓸모를 한 번도 의심받은 적이 없다는 뜻이거든요.
3. 내일 당신 책상에서 — 용도를 다시 묻는 30분
그럼 이걸 내 업무로는 어떻게 가져올 수 있을까요? POS 단말기 대신, 지금 당신이 이미 운영 중인 접점들을 같은 눈으로 보면 됩니다. 대부분 ‘원래 용도’에 갇혀 방치돼 있거든요.
- 결제 완료 페이지·주문 확인 메일 — 열람률이 가장 높은 자산인데, 대개 ‘영수증’으로만 취급됩니다. 사실 이건 고객이 가장 집중하는 순간에 마주하는 최고급 콘텐츠 지면이에요.
- 리타게팅 오디언스 — ‘광고를 뿌릴 대상’으로만 쓰죠. 이미 구축된 이 명단은 설문·베타 초대·커뮤니티 씨앗으로도 쓸 수 있습니다.
- 쌓여 있는 CS 문의 로그 — ‘처리할 티켓’으로만 봅니다. BCP가 신고 데이터를 방패로 바꿨듯, 이건 카피와 콘텐츠 주제의 원석이에요.
- 오래된 블로그·영상 자산 — ‘죽은 콘텐츠’로 방치되지만, 용도를 바꾸면 재편집·재배포의 재료가 됩니다.
실행은 30분짜리 훈련이면 충분해요. 내가 이미 소유하고 운영 중인 접점을 목록으로 적습니다. 각 자산 옆에 ‘이건 원래 ___를 위한 것’이라고 한 문장을 쓰고, 그 정의를 지웁니다. 그런 다음 ‘같은 자산으로, 우리 고객이 가장 곤란한 순간에 뭘 해줄 수 있나’에 한 문장으로 답합니다.
마지막 질문이 핵심이에요. BCP는 ‘우리가 뭘 더 팔지’에서 출발하지 않았습니다. ‘고객이 가장 취약한 순간에 무엇이 필요한가’에서 출발했어요. 그 순간을 먼저 정하니, 답이 새 인프라가 아니라 이미 깔려 있던 단말기로 좁혀진 겁니다. 우리 리포트가 늘 ‘새 캠페인 몇 건’으로만 채워진다면, 이제 반대로 물어볼 때예요. 내가 이미 가진 것 중에, 용도를 한 번도 의심받은 적 없는 자산은 무엇인가.
새것을 만드는 데는 예산과 시간이 듭니다. 반면 이미 있는 것의 용도를 다시 묻는 데는 30분과 한 문장이면 돼요. 발상의 전환이라고 하면 거창하게 들리지만, BCP에게는 실제로 그 한 문장이 전부였어요. 그 문장으로 780만 달러를 지켰고, 도난 신고를 절반 가까이 줄였습니다. 내일 아침, 새 브리프를 열기 전에 자산 목록부터 여는 게 순서일지도 모릅니다.
[에필로그] 이 글을 편집하면서 만약 내가 이 프로젝트의 담당자였다면 나는 어떻게 했을까하고 생각해봤습니다. 아마도 무언가 근사한 시스템을 새로 만들기 위해서 그럴듯해 보이는 기획안을 짜고 있었을 것 같습니다. 이미 가지고 있는 자원으로 이렇게 해결할 생각은 하지 못했을 것 같아요. 오늘은 우리가 지금까지 쌓아온 이미 가지고 있는 자원들에 눈길을 돌려봐야겠습니다. 분명 칸 그랑프리까지는 아니라도 분명 내 문제 해결의 멋진 재료가 될지도 모르니까요. ^^
📌 오늘의 소마코 콕
SOMAKO
BCP는 새 인프라 없이, 이미 깔린 카드 단말기의 용도만 ‘결제’에서 ‘계좌 잠금’으로 다시 정의해 칸 그랑프리를 받았다.
기존 자산의 힘은 유통 밀도(2분 거리 17,500곳)와 친숙함(학습 비용 0)에 있다 — 새로 만들면 몇 년이 걸리는 것들이다.
마케터의 가장 저평가된 자산은 새 채널이 아니라, ‘원래 이런 것’으로 용도가 굳어버린 기존 접점이다.
출발점을 ‘무엇을 더 팔까’가 아니라 ‘고객이 가장 곤란한 순간에 무엇이 필요한가’로 바꾸면, 답이 이미 가진 자산으로 좁혀진다.
참고 자료 3건
- Contagious (2026). SOS POS: Peruvian bank turns 17,500 payment terminals into anti-theft banking network. https://www.contagious.com/en/article/news-and-views/sos-pos-257cc863e92d451e896e23601a1a0fa8
- Grey (2026). Turning Payment Terminals Into Emergency Lifelines. https://www.grey.com/ideas/turning-payment-terminals-into-emergency-lifelines
- adobo Magazine (2026). Cannes Lions 2026 Jury Insights: Circus Grey Lima’s ‘SOS POS’ Creative Data Grand Prix. https://www.adobomagazine.com/advertising-awards/cannes-lions-2026-creative-data-circus-grey-lima-grand-pri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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