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지 못해도 사는 글자, 한글 | 한글이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이유와 다음 과제

수출 포장에서 'dumpling'을 지우고 '만두'라 쓰자 더 비싸게 팔렸다. 식품업계가 '한글 마케팅'으로 원산지를 프리미엄으로 바꾼 사례를 뜯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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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한글은 세계적으로 특별한 문자로 인정받고 있다. 14개의 자음과 10개의 모음만으로 1만 1,172개의 글자를 만들 수 있다. 1994년 미국 과학잡지 디스커버(Discover)에 실린 재레드 다이아몬드의 글에서는 학자들이 한글을 ‘세계 최고의 알파벳’, ‘가장 과학적인 문자 체계’라고 부른다고 소개한 바 있다. 특히 자신의 문자가 없는 인도네시아의 찌아찌아족과 솔로몬제도 일부 지역에서는 자신의 언어를 한글로 표기하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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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한글날은 580돌이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이런 한글의 우수성을 이야기하는 글이 쏟아진다. 그런데 올해는 조금 다른 장면이 눈에 띈다. 한국을 찾은 외국인 관광객들이 귀국 전 대형마트에 들러 한국 과자를 기념품으로 담는다. 필리핀에서 온 한 관광객은 라벨에 한국 글자가 있어서 한국 제품인 줄 알았다고 했다. 그는 한글을 읽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글은 그에게 무언가를 분명히 말해주고 있었다. 이 장면은 마케팅의 오래된 이론 몇 개로 꽤 정확하게 설명된다.

1. 어디서 왔는지가 품질을 말한다

우리가 옛날 일산이라고 하면 최고의 기계로 치던 때도 있었다. 아이와 카세트, 소니 워크맨, 코끼리 밥솥 등이 바로 그것이다. 그 당시 하이테크로 앞서 있던 일본의 제품이라고 하면 우선 품질을 인정하던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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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케팅에서는 이를 원산지 효과라고 부른다. 소비자는 제품을 직접 써보기 전에 ‘어디서 왔는가’로 품질을 먼저 짐작한다. 1965년 이 현상을 다룬 논문이 나온 뒤 수많은 연구가 이어졌고, 여러 연구를 종합한 분석에 따르면 원산지는 구매 의향보다 ‘품질이 좋을 것 같다’는 판단에 더 큰 영향을 준다. 그때 우리가 일제를 보던 눈으로, 지금 세계가 한국 제품을 보기 시작했다. 한글은 그 기대를 불러내는 가장 빠른 단서다. 포장 뒷면의 작은 ‘Made in Korea’보다, 앞면에 크게 적힌 한글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2. 읽지 못해도 통하는 글자

몇 해 전 성분 문제로 논란이 되기도 했지만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은 거의 모든 편의점에서 살 수 있는 꽤 값나가는 고급 아이스크림이다. 2+1 같은 특별한 행사라도 할라치면 내가 쏜다 하면서 친구들에게 대접할 수 있는 아이스크림인 것이다.

그런데 이 이름에는 재미있는 비밀이 있다. 이름만 보면 북유럽 어딘가에서 온 것 같지만, 하겐다즈는 뉴욕 브롱크스에서 시작한 미국 회사다. 창업자는 덴마크어처럼 보이는 이름을 지어냈는데, 정작 그 단어는 어느 나라 말로도 아무 뜻이 없다. 덴마크어에는 ‘ä’ 같은 움라우트도 쓰지 않는다. 그래도 사람들은 그 이름에서 유럽의 장인 정신을 떠올렸고, 하겐다즈는 비싼 값을 받는 아이스크림이 됐다.

1994년 미국에서 발표된 연구는 브랜드 이름을 외국어로 쓰거나 외국어처럼 발음하게 하는 것만으로 소비자의 인식과 태도가 달라진다는 걸 보여줬다. 중요한 건 소비자가 그 말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읽히지 않아도 통하는 글자, 지금의 한글이 바로 그 자리에 있다.

3. 번역하지 않는 선택

한글 포장 자체가 이렇게 해외 소비자들에게 인기인 이유는 K-POP 등 한류의 영향으로 많은 소비자들에게 한글이 노출되고 익숙해진 것에서 기인한다. 한글 자체가 식별력을 지닌 원산지 신호가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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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식품 기업들은 이 흐름을 빠르게 포장에 반영하고 있다. 오리온은 베트남과 인도에 수출하는 제품 포장에 한글을 넣고, 나라마다 달랐던 제품 이름을 하나로 통일했다. 포장에는 ‘대박’, ‘찍먹’ 같은 표현도 담았다. CJ제일제당은 수출용 만두 포장에 영어 ‘덤플링’ 대신 ‘만두’를 적었고, 동원은 ‘고추(Gochu)’, 롯데는 ‘수박(Subak)’을 발음 그대로 표기했다. 현지화의 정석은 현지 언어로 바꾸는 것이었는데, 이들은 반대로 번역하지 않는 쪽을 택했다. 더 흥미로운 건 붕어 모양 아이스크림과 과자의 경우 해외 판매처가 먼저 한글을 넣어달라고 요청했다는 점이다. 파는 사람이 한글이 팔린다는 걸 먼저 알아챈 것이다.

4. 따라 하기 쉬운 신호의 운명

그런데 신호 이론은 여기서 경고를 보낸다. 신호 이론은 소비자가 품질을 직접 확인할 수 없을 때 겉으로 드러난 단서를 보고 판단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처음 가본 동네에서 식당을 고를 때 줄이 길게 늘어선 집에 들어가는 것, 중고차를 살 때 ‘1년 무상 보증’을 내건 차를 더 믿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문제는 신호마다 믿을 만한 정도가 다르다는 것이다. 무상 보증은 차에 문제가 있으면 판매자가 큰 비용을 치러야 하니 쉽게 내걸 수 없다. 그래서 믿을 만하다. 반면 누구나 쉽게 따라 할 수 있는 값싼 신호는 금방 흔해지고 힘을 잃는다. 한글은 어떤 신호일까? 안타깝게도 따라 쓰기 아주 쉬운 신호다. 포장에 한글 몇 글자를 넣는 데는 큰돈이 들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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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슷한 길을 먼저 걸은 사례들이 있다. 영국 의류 브랜드 슈퍼드라이는 옷에 일본어를 크게 새겨 인기를 끌었다. 그런데 그 일본어는 기계 번역으로 만든 것이었고, 일본 사람이 보면 뜻이 통하지 않는 문구가 많았다. 회사도 이를 인정했고, 이 브랜드는 일본에 진출한 적도 없다. 이후 시장에는 아무 일본어나 찍은 값싼 모방품이 쏟아졌다. 이탈리아는 더 큰 비용을 치르고 있다. 이탈리아식 이름과 국기 색깔로 이탈리아산처럼 보이게 만든 식품을 ‘이탈리안 사운딩’이라고 부르는데, 이탈리아 농민단체는 미국에서만 그 규모가 약 400억 유로에 이른다고 추산한다. 이탈리아라는 신호가 강할수록, 그 신호를 빌려 쓰는 가짜도 많아진 것이다. 한글도 예외일 수 없다. 한글 표기 자체가 원산지를 보증하지는 않는다.

보이는 한글에서 보증하는 한글로

결국 한글 때문에 소비자가 제품을 집어 들었을 때 제품을 신뢰할 수 있는 정보도 함께 있어야 제품에 대한 신뢰가 쌓인다는 것이다. 원산지와 제조사를 명확히 표시하는 것, 한국어 표현을 정확하고 자연스럽게 쓰는 것, 제품 이름을 나라마다 바꾸지 않고 일관되게 쌓아가는 것이 그렇다. 오리온이 제품명을 통일한 건 그런 의미에서 단순한 디자인 변경 이상이다. 같은 이름이 여러 나라에서 반복될수록, 그 이름은 누구나 쓸 수 있는 글자가 아니라 특정 회사만 쓸 수 있는 자산이 된다. 나라마다 다른 표기 규정도 챙겨야 한다. 캐나다처럼 영어와 불어 병기가 의무인 곳에서는 한글을 보조 표기로 쓰면서도 존재감을 살리는 설계가 필요하다.

5. 필요조건과 충분조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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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비자에게 인식력이 좋다는 것은 무조건 좋은 일이다. 다만 그 이유만으로 우리 제품이 소비자에게 제대로 어필되는 것은 아니다. 이러한 표식은 필요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닌 것이다. 쉽게 말해, 눈에 띄지 않으면 선택받을 기회조차 없으니 눈에 띄는 것은 꼭 필요하다. 하지만 눈에 띄었다고 해서 소비자가 그 제품을 다시 사는 것은 아니다. 한글은 소비자의 손을 제품까지 데려다줄 수는 있지만, 다시 그 제품을 찾게 만드는 건 결국 제품 자체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눈에 띄는 표식 뒤에 무엇을 채워두었는지가 중요하다.

이 이야기는 수출 식품 기업에만 해당하지 않는다. 우리 브랜드도 무언가를 ‘신호’로 쓰고 있다. 친환경 인증 마크, ‘수제’라는 단어, 특정 색깔, 유명인의 얼굴, 그리고 이제는 ‘한국’이라는 이름까지. 우리가 쓰는 신호는 남이 쉽게 따라 할 수 있는가? 한글이 세계 시장에서 통하는 지금이야말로, 그 신호 뒤에 무엇을 쌓아둘지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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