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11월 11일, 다른 주인 | 빼빼로데이·포키의 날·광군제로 본 기념일 마케팅

빼빼로데이는 회사가 아니라 1990년대 영남 여중생들이 만든 날이었다. 같은 11월 11일의 일본 포키의 날, 중국 광군제와 비교하면 '날'을 키우는 원리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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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거리 편의점마다 빼빼로가 잔뜩 쌓이기 시작하면 곧 빼빼로데이가 다가온다는 걸 알게 됩니다. 벌써 한 해가 저물어 가는구나 싶기도 하죠. 요즘은 뉴욕 타임스스퀘어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볼 수 있다고 합니다. 바로 빼빼로 광고입니다. 롯데웰푸드가 10월 19일부터 11월 15일까지 타임스스퀘어에 빼빼로 광고를 띄웠는데, 2023년부터 벌써 4년째예요. LA 코리아타운에도 광고를 걸었고, 유튜브와 손잡고 빼빼로 캐릭터를 활용한 디지털 기프트도 내놓았습니다. 베트남 대학가에서는 샘플링 행사를, 동남아와 중남미, 유럽에서는 현지 프로모션을 펼친다고 하고요. 한국의 빼빼로데이를 세계의 기념일로 만들겠다는 계획인 셈이죠.

빼빼로데이 타임스퀘어 광고 - 롯제웰푸드

그런데 11월 11일, 1자 네 개가 겹치는 이 날을 기다리는 건 우리나라만이 아니었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에서는 같은 날이 ‘포키&프리츠의 날’이고, 중국에서는 ‘광군제’라 불리는 세계 최대 쇼핑 축제가 열립니다. 같은 날짜를 두고 세 나라에서는 어떤 일이 있었던 걸까요?

1. 여중생들이 먼저 만든 날, 빼빼로데이

빼빼로데이는 회사가 정한 날이 아니었어요. 1990년대 중반 영남 지역 여중생들 사이에서 빼빼로처럼 키 크고 날씬해지자는 뜻으로 서로 과자를 주고받던 것이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학생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퍼진 이 놀이가 언론을 타고 전국으로 번졌고, 롯데는 그 흐름을 마케팅으로 키웠습니다. 고객이 먼저 날을 만들고, 회사가 뒤에서 그 날을 키운 셈이죠.

빼빼로 유튜브 영상 캡쳐

그런데 빼빼로를 보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과자가 하나 있습니다. 일본의 ‘포키’예요. 혹시 롯데가 일본 과자를 들여온 걸까요? 그렇지는 않습니다. 빼빼로는 롯데제과가 1983년에 내놓은 자체 제품이고, 포키는 일본 에자키 글리코가 그보다 앞선 1966년에 출시한 과자예요. 다만 생김새가 워낙 닮은 탓에 ‘원조’ 논란은 꾸준히 따라다녔습니다.

2015년에는 한정판 ‘빼빼로 프리미어’의 상자 디자인이 글리코 제품과 너무 비슷하다는 국내 법원 판결이 나오기도 했고, 반대로 2017년 글리코가 미국에서 포키 디자인을 도용했다며 낸 소송에서는 2021년 미국 항소법원이 포키의 모양을 독점적인 디자인으로 인정하기 어렵다며 롯데 손을 들어줬습니다. 국내에서는 2013년부터 해태제과가 글리코와 합작해 포키를 직접 만들어 팔고 있고요. 같은 모양의 과자가 한일 양국에서 같은 날을 두고 경쟁하고 있는 셈입니다.

2. 회사가 직접 선언한 날, 포키&프리츠의 날

포키와 프리츠는 일본의 대표적인 막대 과자예요. 프리츠는 1963년에 나온 짭짤한 막대 과자로 토마토, 샐러드 같은 다양한 맛이 있고, 포키는 1966년 이 막대에 초콜릿을 입혀 만든 과자입니다. 손잡이 부분만 초콜릿을 묻히지 않아 손을 더럽히지 않고 먹을 수 있게 한 것이 특징이죠.

포키&프리츠의 날

포키&프리츠의 날은 빼빼로데이와 반대의 길을 걸었습니다. 글리코가 1999년 11월 11일에 직접 이 날을 선언했거든요. 그해가 일본 연호로 헤이세이 11년이라 날짜가 ’11·11·11’로 1이 여섯 개나 겹쳤습니다. 첫해에는 11만 1,111명에게 경품을 주는 파격적인 행사도 열었다고 해요. 글리코는 이 날을 일본기념일협회에 정식 기념일로 등록했고, 2012년에는 하루 동안 트위터에서 ‘포키’가 가장 많이 언급된 브랜드로 기네스 기록을 세운 뒤 이듬해 그 기록을 스스로 다시 깼습니다. 회사가 날을 만들고, 꾸준히 이야깃거리를 던져 고객을 그 날로 불러 모은 경우예요.

3. 솔로들이 만든 날, 광군제

중국의 광군제는 또 다릅니다. 1993년 난징대학교 기숙사의 남학생들이 연인이 없는 처지를 농담 삼아 ‘솔로의 날’로 정한 것이 시작이라고 알려져 있어요. 홀로 선 숫자 1을 솔로에 빗댄 발상이 참 재미있죠. 우리나라에도 숫자에 의미를 담은 날이 있습니다. ‘둘(2)이 하나(1)가 된다’는 뜻을 담은 부부의 날인데, 날짜는 11월 11일이 아니라 5월 21일이에요. 같은 숫자라도 누가 어떤 의미를 담느냐에 따라 솔로의 날이 되기도, 부부의 날이 되기도 하는 셈입니다.

중국 광군제

대학가에서만 통하던 이 작은 농담을 2009년 알리바바가 대규모 할인 행사로 바꾸면서 판이 커졌습니다. 이후 광군제는 미국의 블랙프라이데이를 넘어서는 쇼핑 축제가 됐고, 2017년에는 알리바바 플랫폼에서만 하루 거래액이 250억 달러에 이르렀어요. 학생들이 만든 날을 플랫폼이 키운 셈인데, 여기서는 과자 하나가 아니라 ‘모든 상품’이 주인공이 됐다는 점이 다릅니다.

4. 같은 날, 다른 의미

같은 날에 서로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는 사실이 흥미롭습니다. 사실 우리나라만 해도 11월 11일은 빼빼로데이 하나가 아니에요. 한자 ‘十一’을 합치면 흙 토(土)가 되니 ‘土月土日’, 그래서 법정기념일인 농업인의 날이기도 합니다. 2006년부터는 쌀 소비를 늘리자는 뜻에서 가래떡을 주고받는 ‘가래떡데이’가 함께 열리고, 숫자 11이 두 다리를 닮았다고 해서 보행자의 날이기도 하죠. 한 아이스크림 회사는 농업인의 날에 맞춰 막대 두 개짜리 아이스크림으로 ‘쌍쌍바데이’를 열기도 했습니다. 이런 걸 보면 우리도 이 날짜에 묻어갈 것이 없나 한 번쯤 생각해 보게 됩니다.

stock

하지만 우리가 “이 날은 이런 날입니다”라고 주장한다고 고객이 모두 알아줄 리는 만무하죠. 고객 사이에서 “아~” 하며 공감할 이유가 있어야 자연스럽게 퍼지는 겁니다. 빼빼로데이에는 친구에게 마음을 전한다는 이유가, 광군제에는 나를 위해 산다는 이유가 있었어요. 포키의 날처럼 회사가 선언한 날도 결국 매년 고객이 참여할 이야깃거리를 던지며 그 이유를 만들어 왔고요. 날짜를 정하는 것보다, 그 날 무언가를 주고받을 이유를 만드는 일이 먼저인 셈입니다.

5. 날을 수출하는 과자

빼빼로 하나로 이렇게 큰 매출이 생긴다는 건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빼빼로 수출액은 지난해 약 870억 원으로 1년 새 24% 늘었고, 글로벌 통합 마케팅을 시작한 2020년보다 200% 성장했어요. 스트레이 키즈와 함께한 지난해 캠페인 영상은 누적 1억 6천만 회 넘게 재생됐고, 회사는 2035년까지 빼빼로를 연 매출 1조 원 브랜드로 키우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불닭볶음면이 ‘파이어 누들 챌린지’라는 놀이를 타고 해외에서 1조 원 넘는 매출을 올리게 된 것처럼, 빼빼로도 ‘빼빼로데이’라는 놀이를 타고 세계로 나아가고 있는 셈이죠. 한국 학생들 사이에서 통하던 주고받는 이유를 낯선 나라 사람들에게 전하는 데, K팝과 유튜브, 현지 대학가 행사가 운반 수단이 되고 있는 겁니다.

6. 고객의 일상 속으로

우리 제품이나 서비스를 알리는 일은 정말 어려운 일입니다. 그렇다면 빼빼로데이처럼 고객의 일상 속에 이미 들어가 있는 날이나 습관에 우리 제품과 서비스의 의미를 담을 방법은 없을지 생각해 봐야겠습니다. 처음엔 몇몇 학생들의 장난처럼 보였던 빼빼로데이와 광군제가 그랬듯이, 우리가 키울 만한 다음 ‘날’은 회의실이 아니라 고객의 일상 어딘가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분명 조금 더 쉬운 방법으로 고객에게 다가갈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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